딴동네 소리를 찾아서 – 6. 침묵의 소리

Written in

by

작성 06/06/2025
게시 06/07/2025
Poème

Taken by Voyager 1, NASA, 1990.02.14

칼 세이건은 그 유명한 <창백한 푸른 점> 이라는 사진을 통해, 지구가 우주 속에서 얼마나 작은 점에 불과한지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삶이 사실은 공허로 가득한 허무함 속의 한 실존이 아니라, 작은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Sories 는 소리를 다루는 매거진이기 때문에, 칼 세이건에게 소소한 반박을 해야겠다. 우주는 시각적으로는 비어있을 지 몰라도, 소리의 관점에선 아주 시끄러운 공간이다. 수많은 전리방사선과 여기저기에서 방출한 파동들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면, 빅뱅 때 만들어진 소리가 아직도 우주를 떠다니고 있을 정도이다.

사실 우리가 침묵 (Silence),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라고 느끼는 것은, 뇌에서 여러 과정을 통해 불필요한 소리 자극을 억제한 결과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침묵은 아니다. 어떤 소리건 이 세상에서 분명히 발생하고 있다. 하다못해 심장도, 혈관도 계속 뛰고 있고 우리는 이것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소리로 들을 수 있다. 이 현상을 이용한 존 케이지의 대표적 작품인 4‘33’‘ 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침묵이 사실은 가변적인 상태라는 것을 여러 개별적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여러 작곡가들은 침묵도 하나의 소리라고 간주하고, 침묵을 음악에 접목하거나 응용하고자 노력했다. 베토벤의 소나타 32번 2악장은 후대의 많은 연주자들이나 평론가들에 의해 침묵으로 빠져드는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반복하면서도 결국은 마지막 C음의 울림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향해 가는 측면에서 그런 평가를 받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앞서 밝혔던 것 처럼, 침묵은 뇌가 다른 소리들을 억제해 낸 하나의 상태이다. 따라서 침묵을 느끼려면, 그에 대비되는 소음이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베토벤의 32번 소나타는 아주 격정적인 주제들이 1악장과 2악장에 걸쳐 반복되는데, 그 목적은 마지막 침묵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만약 무작위적으로 소음이 발생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이 경우 침묵을 느끼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멋진 공연을 듣고 있는데 뒷 사람이 계속 기침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듣는 이는 음악이 귀에 들리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냥 제발 저 사람이 기침을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음악이 침묵에 도달하려 한다 할지라도, 듣는 이는 침묵에 빠져들지 못하고 다른 잡다한 소음에 더 정신이 팔리게 될 것이다. 또는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음이 음악의 세계로 함께 들어오는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하나의 영화가 있다. 페레 포르타베야 감독의 <바흐 이전의 침묵> 이다. 영화 제목 <바흐 이전의 침묵 (Die stille vor Bach)> 은 스웨덴의 시인 Lars Gustafsson 의 책 제목 <The stillness of the world before Bach>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며, 출처는 불분명하나 에밀 시오랑 역시 비슷한 문맥의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바흐 이전의 세계는 음악이 부재한, 침묵의 세계로 가정했다. 즉 그들에게 일상 속 소리들은 침묵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포르타베야 감독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수많은 소음들 속에서 빛나는 바흐의 음악을 영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빈 전시공간에서 자동 피아노로 울려퍼지는 골트베르크 변주곡,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 뒤에서 평균율을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음악과 일상 속 소리들이 어우러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20명에 달하는 첼리스트들이 지하철에서 무반주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지하철의 소음은 전혀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 같다.


위 장면이 끝나고 나면, 감상자는 대개 잠깐의 침묵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침묵은 음악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면, 침묵은 잠시 숨겨두었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다음, 소음들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만약 이 침묵을 붙잡고 싶다면, 우리는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낼 침묵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

즉, 침묵은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정교하게 설계된 하나의 소리이다. 소리이기 때문에, 침묵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고,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소음으로 둘러싸인 속에서 찾아오는 순간의 침묵이야말로,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중한 <창백한 푸른 점> 일 것이다.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