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05/09/2025
게시 05/10/2025
Poème
이 시리즈는 작성자가 보거나 들었던 공연이나 음악을 현재 시점에서 복기해 리뷰하려는 프로젝트이다. 이번 글은 2025년 5월 7일 토마토홀에서 진행된 <문지영과 프랑스 작곡가들> 공연을 복기하며 쓰는 리뷰이다.
앞선 글에서 다루었듯, 프랑스어는 독일어와 달리 음가에서 수많은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인 로맹 롤랑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어에서는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요. 그러나 프랑스 시가 활동하는 것은 바로 장음과 단음, 강음과 약음의 중간부 입니다. 그것은 하프톤 속에서 무한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요.”1
프랑스 음악도 프랑스어와 비슷하게, 음이 가지는 뉘앙스가 상당히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드뷔시는 루바토만 6가지 이상으로 분석된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음가와 울림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대개는, 프랑스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 루바토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도 울림을 활용해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의 독특한 뉘앙스를 활용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사실 내가 이 공연을 기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문지영은 루바토를 절제하고, 불필요한 울림은 과감하게 끊어버리는 피아니스트이며, 불협화음이 울려퍼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지켜보는 타입의 피아니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전형적으로 독일, 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들의 색을 많이 내포한 타입의 피아니스트이다. 그간 그가 잘한다고 알려진 레퍼토리도 슈만과 슈베르트였기도 하다. 최근 토마토홀에서 연주한 쇼팽 프로그램의 경우, 발라드 4번 연주에서 왼손과 오른손의 루바토에 의도적으로 시간차를 두어 독특한 화성을 연출하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몇몇 곡들 한정이었고 대개는 역시 보수적인 해석이었다고 느껴졌다. 그런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프랑스 음악을 연주할 것인가? 이것이 나의 공연 전 기대였다.
내가 공연을 기대하는 이유가 또 있었는데, 바로 프로그램의 구성이 상당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드뷔시의 선율은 많은 부분 교회음악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부 프로그램이 바로 교회음악에 가까운 음악들을 작곡한 라모, 그리고 그 라모를 추모하는 음악이 담긴 드뷔시의 영상 1권이었다. 말하자면 여기까지는 유럽 전체에 퍼진 교회음악의 선율이 “프랑스 음악” 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보여졌다. 그에 반해 2부는 1부에서 다룬 프랑스 음악이 낭만주의 시대에 어떻게 동시대 음악이 되었는지를 다루는 것 같았다. 잊혀진 영상을 통해 드뷔시가 1870년의 파리로 초대하면, 포레의 무언가, 풀랑크의 무궁동이 울려퍼지고, 그리고 다시 인상주의의 극치를 담은 드뷔시 영상의 2권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었다. 과거와 현재를 다루었다면 미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공연을 함께 본 나의 친구 고건우도 이 프로그램이 끝까지 쓰여진 것 같지 않다고, 분명 앙코르로 3부를 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2022년 리사이틀에서도 문지영은 앙코르로 스크리야빈의 왼손을 위한 프렐류드와 녹턴을 연주하며 멋진 마무리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앙코르도 분명히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 같은데, 그 선택은 라벨일까 사티일까 아니면 아예 불레즈일까? 이런 고민을 하며 토마토홀에 입장하였다.
토마토홀의 첫 인상은 기대 보다는 우려가 더 컸다. 토마토홀은 소극장 사이즈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피아노는 Steinway D 였다. 이런 피아노는 커다란 콘서트홀에 적합하기 때문에, 작은 소극장에서 공연하려면 현의 소리를 펠트로 눌러 두어야 한다. 이 눌러놓은 소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럴 경우 연주자가 우나 코다, 소스테누토 등의 표현을 하는데 있어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게 문제이다. 프랑스 음악처럼 울림의 뉘앙스가 중요한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환경이라면 이 문제는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런 소리 연출이 연주자의 의도였다면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스타인웨이를 써야 한다면 C 정도의 사이즈, 내지는 시게루 가와이의 SK-7 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의 분위기가 부드럽고 포근했기 때문에, 조금 더 포근하고 가라앉는 느낌의 피아노 선택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연주자의 의도였다면 당연히 괜찮다.
1부가 시작되었고, 첫 곡인 라모의 합시코드를 위한 A 단조 모음곡이 시작되었다. 모음곡 전곡이 연주되지는 않았다. I. Allemande, IV. Les trois mains, III. Sarabande, VII. Gavotte 순서로 연주되었는데, Allemande 는 군더더기 없는 amuse bush 의 역할을 하였다. 문제는 Les trois mains 였는데, 왼손의 울림이 하나도 전달되지 않은 채 오른손의 멜로디가 전달되면서 음악이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문지영이 리허설 때 계산해 둔 페달의 깊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녁이 되면서 날씨가 조금 습해졌고, 또 관객들이 홀 안에 많이 차면서 울림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발생한 문제로 보였다. 다행히 곡이 끝날 때 쯤 문지영이 감을 잡기 시작했다. 덕분에 Sarabande 부터는 수정된 페달링으로 음악이 전개되었다. 다만 펠트로 피아노 음을 눌러놓았기 때문인지 여전히 3옥타브를 기준으로 아래와 윗음이 약간은 따로 노는 듯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그래도 그것이 드뷔시의 영상 1권에서는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어서, 매우 흥미로운 연주로 느껴졌다. 신기한 점은 문지영 본인이 늘 치던 방식대로 불협화음은 최대한 절제하고, 음가는 악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으로 연주하였는데도, 음악은 너무도 프랑스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2부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필자가 잘못 본 것일 가능성도 있으나 문지영이 귀마개, 혹은 이어폰을 끼는 것 처럼 보여졌다. 그리고 2부 연주는 1부 때 보다 더 과감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사실 Steinway D정도의 사이즈 피아노를 치면, 연주자는 본인의 연주가 홀에서 어떻게 들릴지 완벽하게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피아노 앞과 옆에서 들리는 소리의 차이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펠트로 소리를 누르면 누를 수록 이 차이는 커진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소리가 나오고 있는지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하면서 연주를 해야 하는데, 귀로 들리는 소리가 그 생각을 방해할 때가 많다. 문지영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고, 다행히 잘 해결되었다. 해결되고 나니, 문지영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 루바토는 여전히 절제되어 있었다. 다만 그가 보여주고 싶은 음들은 명확했다. 그 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어져나갔다. 풀랑크의 무궁동에서 약간은 뜬금없이 등장하는 불협화음들 마저도 문지영이 의도한 음들을 기반으로 한 협화음의 세계가 끌어안았다. 이 흐름은 드뷔시 영상 2권의 2번 곡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 (Et la descend sur le temple qui fut)> 의 25번째 마디 F# 연타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3번 곡 <황금 물고기 (Poisson d’or)> 로 경쾌하게 마무리되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끝이었다. 황금 물고기도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지나치게 울림을 강조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오리엔탈리즘이 강조된 해석이 아닌, 다소 평이하고 흑백소묘에 가까운 해석였음에도 눈앞에 물고기가 다니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앙코르, 그러니까 3부였다. 문지영이 선택한 음악은 사티도 라벨도 불레즈의 것도 아니었다. 바로 드뷔시의 <꿈 (Rêverie)> 이었다. 그것으로 이 공연의 방향성이 명확해졌다. 문지영은 프랑스 음악을 통시적으로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처럼 낭만주의 시대 프랑스로 관객들을 초대한 것이다. 한바탕 즐겁고 슬프고 아름다운 꿈을 꾼 것 마냥. <꿈 (Rêverie)> 의 첫 음이 나오자마자 함께 간 나와 친구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고,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는데, 들으면 들을 수록 너무나도 훌륭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엔 너무나도 유명한 드뷔시의 달빛이 연주되었다. 더 이상 별다른 평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곡 선택은 다소 흔하고 통속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흐름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앙코르는 없었다. 그리고 그 연주는 절대로 통속적이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이 공연에서 나타난 여러 화두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우선 피아노의 문제는, 순전히 문지영 개인의 역량으로 풀어낸 것에 가까웠다. 오해가 있을까봐 첨언하자면, 피아노의 조율은 완벽했고 정음작업의 퀄리티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이 정도 퀄리티의 정음작업이 이루어진 피아노를 한국 공연장에서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간의 특성과 피아노의 특성이 따로 노는 부분을 조율사와 연주자가 최대한 맞추려 노력했음에도, 이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개인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앞서 언급했듯, 다른 사이즈의 피아노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꼭 스타인웨이여야 했을까? 그런 고민이 남는다.
또 한 가지는, 문지영이 전통적으로 프랑스 음악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진 포인트 – 불분명하다고까지 느껴질 수 있는 음가의 뉘앙스와 불협화음들의 조화 – 를 극도로 억제했다는 것이다. 음가는 모두 계산되어 있었고, 불협화음은 통제되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듣는 이들은 모두 굉장히 찐한 프랑스를 느낄 수 있었다. Alexandre Tharaud, Alexandre Kantorow 등 유명한 프랑스 연주자들의 연주보다도 훨씬 프랑스 색채가 많이 느껴져서, 이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문지영이 연주한 프랑스 음악이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프랑스를 담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 모두 문지영과 같은 이방인이었기에, 그 음악에 공감할 수 있었다. (만약 프랑스인이 관객 중 있었다면 그의 생각은 달랐을 수도 있겠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설명으로 옮겨보자. 한국인은 왜색에 대해 어느 정도 민감한 편이다. 일본으로 부터 전래된 동요나 여러 노래들을 부를 때 그런 느낌을 받곤 하며, 특히 엔카의 파생장르인 트로트에서 그러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런데 현대 일본인들이 부른 엔카는 의외로 한국인들이 왜색이 그렇게 진하지 않다고 느끼는 편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색채라고 생각하는 요소들과 일본인들이 그들의 색채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문지영은 그가 잘하는 독일적 해석으로 프랑스 곡을 연주했음에도 프랑스의 모습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잘 담아낼 수 있었다고 본다.
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떤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는 특정 방식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어떤 나라의 작곡가들을 표현할 때는 그 나라의 특정 요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음악계에 일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 나라와 그 작곡가의 색채를 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오히려 연주자 본인 마음속에 있는 그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에 대한 탐구가 기술적인 접근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주자 각자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소리와 음악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공연일 수록, 듣는 이들도 그 공연을 귀하게 여긴다. 문지영의 공연을 본 것이 이번이 3번째인데, 이전에 비해 훨씬 그 의도가 명확해졌고 공연을 하는 내내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음악을 끌어가는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훨씬 매력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공연을 함께 본 친구들은 모두 문지영을 공연장에서 처음 본 친구들이었는데, 모두 문지영의 팬이 되었다. 각자 취향에 맞지 않는 곡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문지영의 의도가 명확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 공연이 그만큼 그들에게도 귀한 경험이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귀한 공연을 앞으로도 여러 연주자들을 통해 많이 체험했으면 한다.
- 오카다 아케오, 음악을 듣는 법(2023), 끌레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