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05/01/2025
게시 05/01/2025
Poème
최근 제 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예선이 진행중이다. 전세계를 대표하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쇼팽 콩쿨 우승자가 지닌 명예를 향해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최종 우승 영예를 얻을 것인가? 쇼팽 콩쿨 주최측에서는 우승자 기준을 아주 직접적으로 밝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역대 대회 우승후보들 중 누가 선정되는지 그 과정을 돌아보면 기준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량이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당대 가장 보수적인 기준을 지닌 심사위원들을 만족시킨 피아니스트가 우승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 콩쿨을 배경으로 삼은 만화 <피아노의 숲> 은 폴란드인들이 판단하기에, 자국의 영웅 쇼팽을 가장 폴란드스럽게 표현한 (만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우리(폴란드인)의 쇼팽이 맞느냐” 라는 대사로 묘사된다) 피아니스트가 고점을 받는다고 묘사했는데, 비교적 쉽게 그 기준을 풀어낸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폴란드스러운 음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쇼팽은 폴란드인이기는 해도 체코계 스승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프랑스에서 오랜 기간 망명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 중 어떤 요소가 폴란드의 요소에 해당하는지 세분화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쇼팽의 소나타 2번 3악장의 경우 “장송 행진곡”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2번의 영향을 받아 쇼팽이 작곡한 음악이다. 그런데, 베토벤의 12번 소나타는 발표 당시 독일인의 혼을 담고 있는 명곡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베토벤이 네덜란드계라는 것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재미있게도 쇼팽의 장송 행진곡 역시 폴란드인의 혼을 담고 있는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독일과 폴란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국인이 듣기에, 두 음악이 어떤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고 어떤 측면에서 두 국가를 구별짓는 차이를 가지는지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이 비단 한국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인들도 그 차이를 구별하기 상당히 어려워한다. 쇼팽이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던 음악적 표현이 현대의 유럽인들에게 온전히 계승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현은 단순히 악보에 적혀 있는 대로, 작곡가의 자필 메모 등을 정확히 표현해본다고 해서 구현되는 것들이 아니다.
비유를 해 보자면, 마치 해외에 오랫동안 나가 있던 교포들이 쓰는 한국어의 성조에 대해 현대의 본토 한국인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교포들이 살았던 시기의 영상을 찾아보면, 그들의 한국어는 그 시대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의 경우 5살 때 부산 대신동에서 경기도권으로 이주했는데, 30살 때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한동안 사는 경험을 하였다. 당시 필자의 부산말은 동료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하는 말투를 쓰네” 라는 평가를 들었는데, 정작 그들과 필자가 사용하는 단어나 성조는 두드러지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음가 차이, 장단음 차이, 성조의 미묘한 차이가 그 뉘앙스를 만드는 것일 텐데, 누구도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진 못했다. 사실 부산의 경우 동남방언과 관련해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도시 안에 산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교통이 좋지 않아 동네와 동네 사이의 고립이 심화되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금정산 아래 장전동과 해운대 인근의 말은 완전히 달랐다고 전해진다. 말씨만 들어도 서로가 부산에서도 어디 출신인지 짐작이 가능했다고 하니, 그 차이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로가 연결되고 부산 안에서의 지역색이 희미해지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현대 부산어는 과거의 부산어의 흔적만 남아 있게 되었다. 활자로 표현되기로는 여전히 같은 성조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느낌은 많이 달라졌다.
이처럼 환경적 고립은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을 고정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우리는 으레 활자로, 시각매체로 전달되는 것이 더 정확한 기록이고 구전의 경우 가변성이 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극적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바로 라틴어이다. 라틴어는 500년 전 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어느 정도는 사용되는 언어였지만 지금은 라틴어 화자가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맞고, 과거의 정확한 발음을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럽에서 소멸된 언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틴어 기록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많다. 발음 기호도 제법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앞서 밝힌 것과 같이 활자로 표현되지 않는 미세한 요소들이 그 언어의 특징을 좌우하는데, 그것이 수 세대에 걸쳐 각 지역의 언어와 융화되는 과정에서 희석되어버려 구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마치 30대인 화자가 20년 전의 한국어 영상을 보면 이질감을 느끼는 것 처럼, 그리고 그 때의 말을 다시 해보려 하면 쉽게 구현하기 어려운 것 처럼.
그런데 이 라틴어가 놀라울 정도로 보존된 사례가 있으니 바로 일본의 지하 기독교인인 카구레 키리시탄들이다. 그들은 과거 선교사가 방문하였을 때 직접 집전한 전례 중 일부를 선교사에게 들었던 그대로 세대에 걸쳐 구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완벽하지는 않으나 수백년 전의 라틴어 성조가 어느 정도는 보존되어 전승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토착 문화와 융화되면서 변형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그들의 신앙심에 의해 잘 보존된 것을 보면 소리가 얼마나 변하기 쉬운 성질을 지녔는지, 또한 그것의 특징을 유지하고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결국 어떤 피아니스트가 쇼팽 콩쿨의 우승을 차지할 것인가? 폴란드인들은 누구의 음악이 그들과 유사하다고 선택할 것인가? 예를 들어 제18회 쇼팽 콩쿨을 통해 인기를 얻은 일본인 스미노 하야토의 경우, 그 실력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이 쇼팽에 대한 파격적 해석임을 또한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수상에 실패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초대 쇼팽콩쿨 우승자들의 녹음과 18회 우승자의 녹음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며, 현대 쇼팽콩쿨 우승자들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스미노 하야토와 비슷한 평가를 받고도 남았을 거란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앞선 질문을 조금은 바꾸어서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폴란드인들에게 쇼팽은 어떤 사람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어떤 연주자가 제 19회 쇼팽콩쿨에서 제시할 것인지 찾아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